재난 앞의 얼굴들, 그리고

코로나 시대의 예술

<재난 앞의 우리, 그리고 예술>(김지연) 리뷰

송소민 기자

작성 2020.05.27 17:25 수정 2020.05.29 15:25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병이 퍼지고 사람이 죽어나가며, 실생활에 밀접한 영역까지 모두 멈췄는데 예술이 멈추는 것에 누가 얼마나 관심을 가질까. 그러나 모든 영역이 그렇듯, 예술계 종사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여전히 애쓰고 있다. 영원히 멈추지 않기 위해서 묘안을 내놓고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재난 앞의 우리, 그리고 예술' 기사 본문 중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진실’은 아마도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를 조명하고, 또 그렇게 하기 위해 그 ‘모든’의 범위를 끊임없이 넓혀가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명쾌한 해답은 아닐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그 존재를 긍정하게 해 주는 희망이 될 수 있다. 특정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회 면면을 선택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닌, 우리네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다채로움을 가능한 많이 담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코로나가 전국을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고, 그 폭풍이 잦아들 무렵 이태원 클럽을 기점으로 지역 사회 감염이 다시 한 번 확산되고 있다. 출퇴근 지하철은 다시 붐비기 시작했고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는 듯 보이지만,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 상처를 떠안게 된 사람들은 그 고통을 여전히 견디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모든 활동이 일체 중단되어, 생계까지 걱정하게 된 예술계와 그 종사자들도 이에 포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인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이러한 고통을 극복하고, 또 긍정적인 영향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코로나 시대의 예술'에 대해 잘 짚어낸 한 기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4월호에 실린, 김지연 에세이스트의 <재난 앞의 우리, 그리고 예술>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기사는 예술계가 코로나로 인해 잠시 멈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재난을 극복하고 또 그것을 새로운 창의성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밝히면서, 공감을 통해 아픔을 극복하고 치유하는 예술의 역할까지 풀어냈다. 기사에 소개된 새로운 형식의 예술과 예술감상의 방식들은 독자로 하여금 예술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을 깨뜨리고, 한계를 독창적인 방식으로 뛰어넘는 예술의 힘에 감탄하게 한다.


더하여, 기사는 ‘재난’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번 코로나 사태, 그리고 기사에 언급된 6년 전 세월호 참사와 같은 사회적 재난은 대규모의 희생자를 만들고, 재난을 겪은 사람은 평생 후유증을 앓게 된다. 그러나 재난 피해자들을 아프게 하는 것은 그 재난과 그에 얽힌 기억들 뿐 아니라, 재난이 초래한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대대적으로 공표된 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ㅡ아니면 너무 지나서 그런 건지ㅡ사람들이 많이 모이곤 하던 인기 관광 장소들은 여전히 북적거린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여행을 가지 못하고, 여러 서비스들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는 것에서 오는 불편함과 불만을 여과 없이 표출하기도 한다. 그들에게는 코로나19가 그저 불편함이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사회적거리두기실패 태그를 달아 꽃 속에 파묻힌 자신의 예쁜 사진을 업로드할 수 있지 않았을까.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하루하루 전쟁을 치르는 의료진들, 또 코로나 바이러스의 희생자들에게는 코로나19가 너무나 큰 아픔이고 재난임을 간과한 사람들에게, 재난 피해자들은 다시 한 번 상처를 받는다. 기사는 재난을 피해자를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의 시선에서 재구성하는 여러 예술 작품들 또한 소개하며, 공감을 창출해 타인과의 연결다리 역할을 수행하는 예술에 대해 역설한다.


기사에는 조은정 큐레이터의 온라인 전시 <The Peaceful Warriors in Museum>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다. 밝은 표정의 얼굴들이 파스텔톤의 네모진 배경에 담겨 나란히 전시되어 있는 모습은, 최근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한 외신기자의 사진들을 연상시킨다. AFP 기자이자 사진작가인 에드 존스는, 마스크 자국을 따라 밴드는 덕지덕지 붙인 의료진들의 얼굴을 촬영하여 그의 개인 SNS에 업로드했다. 그들의 고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상처와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는 눈, 즉 ‘얼굴’을 보여줌으로써 코로나 사태 진정을 위해 밤낮 없이 애쓰는 의료진 및 자원봉사자들의 노고를 널리 알리고자 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얼굴'이야말로, 납작하게 도열된 글자에 불과했던 것들이 가장 입체적으로, 피부 가까이 와 닿게 하는 무언가인 것 같다. 멀게만 느껴지는 위기와 재난이 어떤 삶들을 앗아가고 있는지, 무심코 짓밟은 그 건너편에서는 누구의 눈이 울고 있는지, 그리고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내면 깊숙이 침잠해있던 스스로의 얼굴까지. 파괴되고 또 외면받는 그 수많은 얼굴들을 가장 처절하게, 또 생동감 있게 재현해내는 것이 바로 예술인 것이다.


예술 에세이스트인 기자는 예술이 “사건의 표면과 커다란 흐름이 아닌, 그 사이에 산재한 작은 점들을 연결해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것을 가시적으로 드러낸다”고 말한다.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는 시스템을 두고, 그 결에 숨어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을 굳이 봐야 하냐며, 예술의 ‘필요’ 혹은 ‘효용’을 의심하는 이들도 여전히 많다. 사회학자 필립 슬레이터가 제안한 ‘변기 가정(toilet assumption, 원치 않는 문제나 원치 않는 어려움, 그리고 원치 않는 복잡함과 장애물을 우리의 직접적인 시야에서 제거하면 사라질 것이라는 믿음’이 설명하듯, 당면한 문제를 외면하고 회피함으로써 심리적 고통을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예술은 고통의 신속한 ‘해결’이 아닌, ‘치유’를 말하는 유일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자신 밖의 다른 생명들의 ‘얼굴’을 마주하게 해 줌으로써 자기중심적, 황금만능주의적인 사고를 탈피하게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공감을 통해 마음속에 쌓인 상처를 치유하고, 그렇게 만들어낸 “마음의 그물”이 사회를 지탱한다면, 어떤 존재들에 대한 소외와 배제도 점차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공감’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연대를 구축함과 동시에, 세상에는 함께할 수 있고 또 함께해야 하는 또 다른 존재가 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공감을 통한 치유가, 자본주의의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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